생활의 발견

서정주, <신부>

쑨아이 2010. 3. 1. 11:10

서정주, <신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을 열어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주제: 죽음을 뛰어 넘는 여인의 정절

해제

이 시는 시집 <<질마재 신화>>의 맨 첫머리에 실린 작품으로, 한국 여인의 매서운 절개를 짧은 이야기체로 형식으로 엮어 놓고 있다.

이 시는 내용상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산문시이다. 전반부는 순간적인 오해로 인해 첫날밤 신부를 버리고 달아난 신랑의 이야기로,

행위의 초점이 신랑에게 맞추어져 있다.

신랑은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하고 달아나 버린다.

신랑의 조급한 성질과 지각 없는 판단이 비극의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후반부는 40~50년이 지나, 신랑을 기다리다 매운 재로 변한 신부의 이야기로 신부의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40~50년이 경과한 뒤, 생명이 없음에도 신부가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매운 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은

일부종사하는 열부(烈婦)로서의 매서운 신념을 암시하면서, 유교적 이념의 정신 세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초록 재, 다홍 재'는 그 현세적 가치를 뛰어넘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하나의 신화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신부는 '초록 재와 다홍 재'가 되어서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음으로써, 이 이야기 속의 신부는 현실적인 열녀의 세계를 뛰어넘어 육신의 세계를 초월한 영적인 세계로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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