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경전철
“아~~바다다” 소리치며 양말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바닷가로 뛰어 들었던 유년시절! 따스한 햇살에 데워진 모래입자가 발을 간질이던 모래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꼼지락 꼼지락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어오는 느닷없는 바닷물의 공격에 웃음이 터졌던 추억 속엔 어김없이 기적소리 울리던 ‘기차’가 있었다. 철길 옆으로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고,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를 따라 걸으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던 행복했던 기억은 지금도 기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면 왠지 모를 설레임이 차오른다.
내가 살고 있는 용인에 경전철 교각공사가 마무리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시험가동중인 경전철이 좁은 레일 위를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타이머신을 탄 듯, 30년 전 낡고 쇠락한 철로를 달렸던 ‘수여선’과 ‘수인선’ 협궤열차가 오버랩 어 스친다. 용인시민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수여선 협궤열차가 적자운영을 부담할 수 없어 1972년 4월 1일 운행이 정지되었는데, 다시 경전철로 태어난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협궤열차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수탈이 만들어낸 것이다. 일본은 여주 이천에서 수탈한 질 좋은 경기미와 석탄, 용인의 사금을 수원까지 가져갔고, 수인선을 이용해 인천지역 소래포구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선박으로 일본까지 나르는 용도의 열차였다. 철도부설시 이 구간에 땅을 가지고 있던 용인사람들은 강제수용 당했을 뿐만 아니라 강제부역으로 4천여 명이 항거했다. 일제는 아무런 보상 없이 철도용지와 노동력까지 빼앗았다. 수여선을 건설한 조선경동철도가 종점을 여주로 잡은 것은 남한강 수로운송과 연관이 있다. 세월이 흘러 각종 역사기록과 자료를 통해 수여선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수여선은 단순히 지나간 추억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이 타기에는 너무 좁아서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협소했다. 중간에 선로를 건너는 사람이 있으면 자동차처럼 멈춰서기도 하고,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주기도 했다. 트럭이나 황소와 부딪쳐도 전복된다는 열차였다. 고작해야 40-50킬로미터의 속력이 고작이다보니 수원과 소래간의 시간이 1시간 반이나 걸렸다. 지금의 신갈-어정-용인-송문-양지-제일리 역을 마지막으로 이천으로 땅으로 들어간다. 용인관내를 통과하는 길이는 26킬로미터로 6개의 역을 통과했다.
해방이후엔 지역민들의 삶의 애환과 희망을 동시에 실어 날랐던 대중교통수단으로 변모했다. 수원역에서 환승하여 서울, 부산, 인천을 갈 수 있는 철도로 시너지 효과란 지금의 KTX 고속전철, 자기부상열차 그 이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수여선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고, 1973년까지 운행됐던 협궤열차였기에 사진기록도 많고, 철도박물관엔 당시 운행되던 수여선의 일부가 남아있다. 수여선 운행이 중단되기 직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던 당시의 이런 저런 상황에서는 중단이 어쩔 수 없었는지 몰라도, 미래를 보지 못했음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시간을 흘러 추억으로 남기엔 아름답지만 잔혹했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달리는 용인경전철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문명의 시계가 멈춘 듯한 과거의 용인이었지만 경안천 생태하천을 따라 레일 위를 달리는 경전철은 용인의 미래 지도를 바꾸어 나갈 날개로 비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