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국 장군
☀☀이주국 장군 고택
오백 이주국(1721∼1798)의 생가로 전하는 가옥이다. 이주국은 조선 후기 문신이며 조선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의 후손으로 영조 16년(1740)에 벼슬길에 올라 형조판서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안채 기와에 쓰여진 기록에 따르면, 이 가옥은 영조 29년(1753)에 세운 건물이다.
현재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왼쪽부터 광·부엌·안방·대청·건너방 순이며, 안방 뒤쪽과 건너방 앞에 각각 방이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규모로 청방·방·다락방과 아궁이를 짜임새 있게 갖추고 있는 형태이다. 행랑채는 앞면 7칸으로 대문·방·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본 가옥은 조선 영조(英祖)·정조(正祖) 년간에 무신으로서 많은 공적을 남긴 이주국(李柱國 1721~1798)의 생가(生家)로 전한다. 이주국은 조선 정종(定宗)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경종(景宗) 1년에 이 곳 원삼면 문촌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 곳에 전하는 관련 유적으로는 묘소·신도비·생가·정자터 등이 전한다. 묘역은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건축연대와 관련하여 안채의 망와(望瓦)에 기록된 명문(銘文)을 참고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건륭18년계유일조작(乾隆十八年癸酉日造作)'이라고 되어 있어 이 가옥이 영조 29년(1753)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가옥은 안채·사랑채·행랑채 등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형(字形)을 기본으로 하여 가운데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을 두고 그 앞으로 3칸의 날개를 달아 부엌, 광을 두었다. 부엌날개의 반대편으로 안방 뒤에 한 칸을 내달고 대청 맞은 편 건너방 앞으로도 반 칸을 덧달아 지붕은 공자(工字)의 한쪽 날개가 생략된 형태를 갖게 되었다. 사랑채는 4칸으로 구성되었는데 왼쪽에 청방을 두고 가운데 2칸에 방과 마루, 오른쪽에 다락방과 아궁이를 시설하였다. 행랑채는 길에 면하여 7칸 반으로 구성되었는데 소슬 대문 옆으로 2칸의 방을 들이고 나머지 4칸은 창고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경기도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곱은자집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으나 안방 뒤와 건너방 앞으로 각각 한칸, 반칸을 덧달아 3량가로 가구함으로써 곱은자집의 확대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사랑채는 안채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나 평면구성에서 방과 마루, 다락, 아궁이 등이 짜임새 있게 갖추어지고 각각의 시설이 성격과 방향을 명확히 나태내고 있다. 아직 누마루가 갖추어지지 않은 점은 고전적 평면의 특징이다. 현재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마당과 안마당이 연속되어 있으나 원래의 모습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사랑채의 평면구성 특히 청방과 아궁이의 위치, 최근에 안마당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화단 등에서 볼 때 사랑채의 오른쪽 모퉁이를 기점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을 구획하는 담장과 중문채가 있어서 각각의 공간을 명확하게 나누고 동선과 시선도 분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하면 사랑채의 전면과 측면의 구성에 대한 성격과 기능이 뚜렷해지고, 행랑채의 대문과 방의 위치, 안마당의 크기와 시선 방향 등이 적절한 구성을 갖게 된다. 화계의 조성, 식목, 뒤란의 활용, 경사지의 조절과 담장의 구성 방법 등은 향촌에 조영된 반가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원형을 잃어 가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가옥의 입지와 채 구성, 공간 분할, 조경 수법 등에서 고전적인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문화재자료 제96호(경기) 용인이주국장군고택(龍仁李柱國將軍古宅)|작성자 nocleaf
대가집안의 보통사람들 - 정영대 가옥
유적지 : 용인 12. 시대구분 : 조선시대
대가집안의 보통사람들 - 정영대 가옥
정신없이 돌아가던 산업사회를 지나 잠깐의 '쉼'조차 용납되지 않는 정보전쟁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거추장스럽지 않으면서도 많은 기능을 하는 것을 원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편리함을 제일로 하는 실용성이 최우선의 조건이다. 음식문화에 있어서 라면같은 인스턴트 식품이 그렇고, 특히 똑같은 구조로 된 수십층의 아파트가 사람들의 호응을 받는것도 다 그 때문이다. 실용적이면서도 도시에 집중 된 대규모의 인구를 효과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제는 집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아파트는 옛 조상들의 지역에 따라 지형에 맞게 공간을 활용하여 집을 짓던 자연친화적인 멋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모난 구석없이 모든게 두리뭉실한 초가집들은 이제 민속촌에나 가야 만날 수 있고, 수백개의 이랑과 고랑이 이어져 만들어낸 고운 선과 살짝 치켜진 추녀끝 반전의 멋도 고궁이나 기껏해야 절집의 형태에나 쓰이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요즘의 기와집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다.
주인 바뀐 이주국 장군의 집
용인 원삼면 문촌리는 한자로 표기되기 전 우리말 이름은 문시랑리로 불렸는데, 조선시대 어느쯤에 이 마을에 살던 선비가 시랑벼슬을 받으면서 문시랑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으로 굳어버렸다는 유래에서 조상들이 가졌던 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곳 문촌리에는 정조의 신임을 받았던 이주국장군이 살았던 집이 이제는 바뀌어 버린 주인을 보듬고 마을의 분위기를 압도하면서 자리잡고 있다.
이주국장군은 조선 2대 임금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의 후손이다. 1740년(영조16)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장군으로 20여년 있는 동안 총융청에 7회, 어영청에 6회나 임명되고 금영대장, 훈국대장등도 여러번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여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드물었으나 병졸들은 부드럽게 잘 다루었다고 한다. 정조가 특히 아꼈는데, 오백(梧柏)이라는 당호도 춘당대회에서 활쏘기를 하는 그의 모습에 비유하여 정조가 내렸다고 한다. 이장군의 묘역도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가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 가옥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정식 명칭이 정영대가옥이 되었다. 100여년전까지만 해도 이주국장군의 후손이 살았는데, 현 주인인 정영대 할아버지가 어릴 때 선친이 매입했다고 한다. 정영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정조가 이주국장군을 각별히 아껴 강화행궁을 이장군에게 하사한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증거로 일반 가정집에서는 칠하지 않는 단청이 겨울 외풍 방지용 덧문인 장지문 4폭에 칠해져 있으며 안채 대들보를 옮겨 복원할때 너무 커서 잘라내야 했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시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일반 가정집이 서너칸의 집들이 여럿 모여 하나의 대갓집을 이룬 것에 반해 정영대 가옥은 여러 칸으로 지어진 한두채의 건물이 큰 집을 이루고 있다.
전통건조물 3호로 지정된 이 집은 보존 상태가 좋은 안채의 망화에 '건륭 18년 계유조작'이란 기록이 있어서 영조29년(1753)에 건축되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래서 정영대 할아버지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는 듯 하다.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행랑채는 다시 지어지고 사랑채도 많이 변형되어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몇개의 기둥과 대들보는 원래의 것인 듯 옅은 색의 새로 세운 나무기둥과 대조를 이룬다.
할아버지 말씀이 처음에는 모두 나무결이 촘촘하고 섬세한 조선소나무로 된 목재가 사용되었다고 하였지만 복원하면서 쓰여진 목재는 결이 엉성하여 눈으로 보기에는 무른 나무 같아 보인다고 하셨는데, 서로 비교해 보니 차이점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옛집에 사는 사람들
안채에 붙은 누마루를 거느린 방이라든지 집 뒤로 길게 낸 후원에 심어진 감나무 같은 유실수, 행랑채 앞의 향나무 등, 전통가옥의 운치를 최대한 살렸던 흔적이 곳곳에 보여지는데, 강아지 손도 빌린다는 촌동네 늦가을의 그집 풍경은 땅에 붙박고 선 집채들 외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듯 어수선하기 이를데 없다.
정영대가옥만한 규모의 집에 맞는 분위기라면, 싸리 빗자루 자국 선명한 마당을 지나 윤기 나는 대청마루 위에서 머슴부리는 대감의 호령소리 들려오는 집.....
시대는 변해 신분제 사회는 붕괴된지 오래고, 가을 걷이에 바쁜 사람들은 들로 다 나가버린 집에 기침소리로 집을 지키시는 정영대할아버지는 목까지 차오르는 호흡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얘기를 쏟아 놓으신다. 끊일 듯 이어지는 말소리에 겨우 알아 듣는 몇마디지만 그 속에는 자랑스러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주머니 가득 밤을 주워서 문을 들어서시는 아들 할어버지는 그 밤을 한 톨도 남김없이 모두 손에 쥐어 주시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시는데, 집의 외형은 TV에서나 볼 수 있었던 대가집이지만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인정 넘치는 우리 이웃사람이다. 3년 후면 모든 복원 작업이 끝난다고 하는데, 그때는 그 공간과 사람이 또 어떤 모습으로 어울려 살아갈지.
이주국(李柱國)의 묘소는 원삼면 문촌리 문수산 기슭에 있다. 일반적인 규모의 봉분에 묘비·상석·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망주석·석수등 석물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소를 기준으로 신도비는 남쪽으로 150m 지점에 있다.
신도비는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고, 비신의 재료는 대리석이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190㎝, 폭 80㎝, 두께 39㎝의 규모이다. 비의 앞면 상단에는 횡서로『崇禎大夫行刑曹判書李公 神道碑銘』이라 전자(篆字)했는데, 유한지(兪漢芝)가 전액(篆額)을 썼다. 비문은 송환기(宋煥基)가 짓고, 이재의(李載毅)가 글씨가 썼다. 순조 1년(1800)에 세웠다.
문수산의 중출맥이 뻗어내려온 자리에 자기의 고택을 바로보지 않도록 무리하게 좌향을 돌려서 묘터를 잡은 관계로 안산의 좋은 기운을 받지 못하고 또 주맥의 기운을 逆하였기에 이 묘를 쓰고 그 후손들이 破産되면서 요절햇으리라.
그래서 그 고택도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넘어 갔으며, 이 묘소도 허물어졌던 것을 고택이 향토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이 묘소도 1 ~ 2년전에 다시 재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또한 곧 허물어징 조짐이 보이니 이 또한 이 땅이 가지고 있는 기운탓이리라. 그래서 지금이라도 빨리 자향을 다시 잡아서 바로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이주국 장군의 古宅
이주국 장군의 또다른 유적으로 생가·정자터, 古宅 등이 전한다. 그의 고택은 이제 정씨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준 부인의 애기로는 그녀의 시조부가 약 100년 전에 이곳을 사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전에는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쳤는데, 이 터가 너무 세어서 평균 6개월 이상을 살은 사람이 없었으며, 심지어 6개월도 살지 못하고 그냥 버러두고 도망간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문수산의 기맥이 곧바로 내려온 곳에 동남향으로 지은 이집은 그 좌향이 잘못되었다. 기맥이 내려온 방향은 서향인데 남향집을 짓기 위해서 이를 가로막는 방향으로 지었으니, 정맥의 殺氣를 바로 받는다. 이같은 연유로 이집은 그 氣가 너무나 세다. 이같이 센 氣를 조절하고 또 東四宅의 조건을 충족함과 남.여 유별함을 보존하기 위해서 中門을 높게 지었는데,그 동안의 잦은 손바뀜과 부실한 관리로 이 중문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화단이 생겼다. 정씨부인의 설명으로는 기가 너무 세고 또 漏氣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화단을 본인이 조성하였다고 한다. 마루에 서 있으면 氣가 문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몸으로 느껴볼 수가 있을 정도로 지금도 漏氣가 심하다. 그래서 만약 중문을 다시 만들지 않을려면,현재의 화단을 1m 이상으로 높게 조성하고 높은 활엽수와 꽃을 심어서 이 누기를 방지하라고 일러주었다.
정조가 강화에 있는 옛 궁궐을 헐어서 재목을 공급해주어 지었다는 이 고택은 정말로 좋은 육송으로 지은 집이다. 하나같이 고른 석가래와 아름들이 나무를 잘라서 만든 기둥등이 옛 육송이 갖는 육중하고 고급스러운 기운을 품기고 있으며 못하나 쓰지 않고 겹창살로 만든 문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 였고, 또 날아갈듯이 만든 燕尾形 추녀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하지만, 이 집도 보수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 좋은 석가래들이 빗물로 인하여 썩어가고 있어서 하루 빨리 보존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정자터는 서남쪽 500m지점에 위치해 있다. 정자터는 이 장군이 낙향하여 지었다. 정자터는「퇴보정」터로 추정된다.
이주국(1721-1798)장군은 조선 정조때 무신으로, 자는 군언(君言), 호는 오백(梧栢),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영조 16년(1740)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 충청도 병마절도사,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함경북도·평안도·황해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어서 총융사(摠戎使)겸 여사대장(與士大將), 좌·우포도대장(左右捕 盜大將), 훈련대장, 어영대장(御營大將), 금위대장(禁衛大將)등을 역임 한 뒤, 정조 19년(1795) 군기사제조(軍器寺提調)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훈련대장 이주국이야기>
이주국(李柱國)은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무관으로 할 수 있는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가 총융청(總戎廳) 대장으로 있을 때 일이다.한강 백사장에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는데 한 군사가 배앓이를 한다면서 맨뒤에 처졌다.이주국은 그가 꾀병을 하는 것으로 여겨 몇 차례 주의를 주었으나 거듭 뒤처지자 화가 나서 발길질을 한 번 했더니 ,어이없이 푹 쓰러져 죽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시체를 잘 수습하게 명하고는 훈련을 계속하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시신 곁에 군사의 아내인 듯한 부인과 아들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공적인 일로 기압을 준 것이지만 마음이 무거워진 이주국은 장례 비용이라도 보태줄 셈으로 다가가 위로의 말을 했다.
"네 남편을 고의로 죽인 것이 아니니,그리 알고 이건 장례 비용에 보태 쓰거라"
병사의 아내는 고맙다면서 돈을 받는데,옆에 있던 아이가 자기 어머니를 말렸다.
"그 돈 받지 마세요?"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의 두 눈은 원망과 분노에 가득차 금방이라도 덤빌 듯이 이주국을 노려보았다.섬찍한 생각이 든 이주국은 아이를 타일렀다.
"아버지가 죽어 네가 의지할 곳이 없겠구나.아무 때나 나를 찾아오면 네 아버지 대신 공부도 시켜 주고 장가도 들여줄 터이니 어머니와 상의해 보거라."
얼마 후 그 소년은 어머니가 보내서 왔다면서 이주국을 찾아왔다.이주국은 소년을 늘 옆에 두고 보살피며 친아들 이상으로 대해 자기에 대한 원한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장성하여 청년이 된 소년은 이주국을 아버지처럼 대하면서도 혼자 있을 때는 괴로워하는 표정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닌 듯 했다.공부를 하다가도 부모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책장을 덮고 밖으로 뛰쳐나가 실컷 우는 눈치였다. 이주국은 항상 그의 행동을 눈여겨 지켜보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곁을 떠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 들려던 이주국은 방문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보고는 몸을 피해 동정을 살폈다.얼마 후,다름 아닌 그 청년이 손에 비수를 든 채 자기의 침상 곁으로 다가서더니 중얼거렸다.
"제가 비록 어르신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나 어찌 사람의 자식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의 배은망덕함을 너무 꾸짖지 마소서."
그리고는 이주국의 침상을 힘껏 내리찍고는 울면서 나갔다.숨어서 이런 광경을 보고 있던 이주국은 얼른 뛰쳐나가 청년을 끌어 안았다.
"됐다.이제 네 아버지의 원수는 갚은 셈이 아니냐? 이제부터 나에 대한 원한을 잊어버리고 부자처럼 지내자."
이주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죽을 죄를 지었다면서 하직을 고하고 표연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