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과 쉬광핑
루쉰의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주수인)이다. 5․4운동의 선봉자라고 일컫는 루쉰은 1881년 저장(浙江절강) 샤오싱(紹興소흥)에서 태어났다. 1918년 38세 때, 그가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쓴 가족 및 봉건제도의 폐해를 비난한 첫 소설 <광인일기>가 <신청년(新靑年)> 제4권 5호에 실렸다.
1920년 가을, 루쉰은 베이징대학과 여자사범대학 두 곳에서 중국소설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가 여자사범대학에 강의하기 전, 그의 소설 <아큐정전>, <상서(傷逝)>, <공을기(孔乙己)> 등은 여자사범대 학생들이 즐겨 읽던 작품이었기 때문에 여자사범대학에서 가진 그의 첫 강의는 쉬광핑(許廣平)을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목 놓아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쉬광핑과 루쉰>의 저자인 니모옌(倪墨炎예묵염)은 책에서 “당시 여학생들은 저우수런(周樹人)이란 이름의 교수가 바로 루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호기심에 도대체 저우슈런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자 하였다.”라며 적고 있다.
하지만 총총걸음으로 수업에 들어온 루쉰을 본 학생들은 크게 놀랐다. 그의 장삼 특히 바지 윗부분과 무릎에 온통 기운 흔적이 있고 신발에도 몇몇 군데 기워져있었으며, 머리도 긴데다 체격도 보통이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그가 마치 거지같다고 수군거렸다.
루쉰 외에도 저우쭤런(周作人주작인), 린위탕(林語堂임어당) 등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교수들이 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평소에 양복에 가죽구두를 신은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루쉰은 전혀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니모옌은 책에서 “저우쭤런과 루쉰은 자주 장삼을 입었지만, 저우쭤런의 장삼은 헤진 곳이 없이 매우 멀쩡했으며, 쉬서우상(許壽裳), 린위탕(林語堂)은 자주 양복을 입었는데, 특히 린위탕은 항상 멋들어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하지만 루쉰은 옷차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책상 위에 물이 떨어져 있으면 걸레 없이 소매자락으로 그냥 쓱 닦을 정도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작은 키에 아무렇게나 차려입은 루쉰이 수업을 시작하자 쉬광핑과 다른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빨려들었고 어느 사이엔가 첫 수업이 금방 끝나버렸다. 학생들이 정신을 차릴 때쯤 교실 안에 루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후에 쉬광핑이 <루쉰과 청년들>이란 글에서 당시의 수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학생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때 초봄의 바람이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갔으며 음산한 가운데 한줄기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한숨을 내뱉으며 정신을 차렸다.”
루쉰과 함께 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후스(胡適호적), 리따자오(李大釗), 린위탕 등의 교수들은 새로운 사상을 인간해방을 갈구하던 여학생들에게 전해주어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5․4신문화운동은 젊은 사람들에게 전통사회체제에 대한 파괴와 혁신, 특히 봉건혼인제도에 대한 저항심을 가져다주었다. 봉건혼인제도는 베이징 여자사범대학 학생들이 보편적으로 겪고 있던 골치 아픈 문제로 쉬광핑도 예외가 아니었다. 까오띠(高第)거리는 광저우(廣州)에서 유명한 상가로 청나라 말부터 많은 점포들이 들어섰으며 좋은 물건들이 많았다. 쉬광핑은 1898년 2월 12일 바로 이곳의 한 대가족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녀가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부모는 마씨 성을 가진 집에 그녀의 혼처를 정했었다. 쉬광핑은 이 혼사를 반대하고 무효로 만들려고 했으나 마씨 집안에서는 혼사를 깨뜨리는 것을 원치않았고, 결국 그녀의 집안에서 마씨 집안에게 며느리를 다시 들여도 충분할 만큼의 손해배상금을 주면서 일단락됐다. 마씨 집안과의 혼담에서 해방된 후, 1922년 쉬광핑은 베이징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1920년 베이징 대학이 솔선수범하여 여성에 대한 대학교육의 제재를 풀었다. 그리고 2년 후, 국민정부에서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정식으로 인정하였다. 그 해, 중화교육개선사(中華敎育改善社)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당시 전국적으로 여자대학생이 887명으로 전체 대학생의 2.5%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이 여학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쉬광핑은 여자사범대학에 들어갔고 루쉰을 만나게 된 것이다.
루쉰, 후스(胡適), 천두시우(陳獨秀진독수) 등의 교수는 학생들에게 민주자유사상을 가르쳤고 구(舊)교육체제와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학생에게 모두 초록색 교복을 입게 했으며 지키지 않을 경우 처분을 받게 했었다. 그런데 양인위(楊蔭楡)가 총장이 된 후 학교규율이 더욱 엄격해졌으며 결국 쑨원(孫文손문) 추모식은 ‘양총장 몰아내기’ 운동의 도화선이 돼버렸다. 여자사범대학 학생들은 베이징<경보(京報)>에 양인위총장을 몰아내기 위해 당시 군벌정부의 소식란에 이 사실을 실었다. 그러나 결과는 쉬광핑 등 6명의 학생이 제적처분을 받았고 쉬광핑은 “학생들을 해친 천방지축 날뛰는 말”이라는 질책을 받았다.
학교의 공고란에서는 학교측이 선동학생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공개적으로 발표했으며 그 내용을 부모들에게 보냈다. 부모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 채 학교측이 보내온 내용만 보고 자신의 딸이 학교에서 규율을 지키지 않았다고 오해를 했고, 결국 루쉰과 몇몇 교수들이 단합하여 성명을 쓰게 되었다.
1925년 5월 27일, 루쉰, 린위탕, 저우쭤런 등 7명의 교수가 <경보京報>에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여자사범대학의 학생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리고 그 달에 루쉰과 쉬광핑은 모두 6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에서 두 사람의 호칭과 서명은 큰 의미를 가진다. 처음에 쉬광핑은 루쉰을 교수님이라 했다가 나중에는 쉰교수님이라 불렀으며 서명도 어린학생에서 그냥 학생으로 바뀌었다. 루쉰은 쉬광핑을 광핑형제라 부르다가 천방지축으로 불렀으며 결국엔 “my dear teacher”, “당신의 천방지축”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보아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매우 친밀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팡(兪芳)여사는 루쉰과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1920년대, 그녀는 매주 일요일마다 루쉰의 집에 놀러왔었는데 그의 집에서 자주 쉬광핑을 볼 수 있었다. 위팡은 후에 “쉬광핑은 키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컸다. 그리고 매우 대범하고 눈빛이 초롱초롱했으며 눈도 큰 편이었고 눈썹과 눈 사이가 넓어보였으며 매우 총명한 모습이었다.”라고 회상하며 말했다.
1925년 6월, 결국 양인위가 학생들에 의해 쫓겨났다. 그리고 학생들과 교수들은 수업을 계속 했으며 학교는 평정을 되찾았다. 단오절 날, 루쉰은 쉬광핑과 위씨 자매 등 6명의 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같이 단오절을 보냈다. 위팡은 당시의 식사풍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위팡은 그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밥을 먹기 시작한 후 쉬광핑과 왕쉰친(王順親)이 루쉰에게 술을 한잔 따라줬는데, 나중에는 포도주가 너무 약해 황주(黃酒)로 바꿨고, 또 황주가 약하다며 백주(白酒)를 마실 배짱이 있는지 물었다. 루쉰은 백주를 마신다면 마신다고 대꾸했다”.
단오절날 모임을 가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여자사범대학의 학생운동에 개입하였다. 그리고 양인위는 보수를 한다는 구실로 경찰을 데리고 학교에 와서 강제로 학생기숙사를 닫았다. 학생기숙사가 강제로 닫히자 집이 광둥(廣東)에 있던 쉬광핑은 갈 곳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때 루쉰이 쉬광핑에게 잠시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였다.
시싼탸오(西三條)골목에 있는 루쉰의 집은 작은 중국식전통가옥으로 북쪽에 모두 세 개의 방이 있었는데 동쪽에는 어머니가, 서쪽에는 부인 주안(朱安)의 방이었으며 루쉰은 북쪽에 뒤로 연결된 작은 방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루쉰은 그 방을 호랑이꼬리라고 불렀다.
쉬광핑은 루쉰의 집에서 루쉰을 위해 원고를 베끼는 일을 도왔는데 글을 베끼는 속도가 매우 빨라 하루에 만자를 거뜬히 베꼈다.
<쉬광핑과 루쉰>의 저자 니모옌은 책에서 “루쉰은 방에 들어와 베낀다고 고생한다며 쉬광핑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의 행동에서 쉬광핑은 자신에 대한 루쉰의 관심이 사제지간을 이미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주안은 루쉰의 조강지처로, 그녀와의 결혼은 루쉰이 유학하고 있을 당시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었다. 루쉰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주안을 맞아들였고, 그는 주안을 매우 존중하였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애정도 없었지만 싸움 한번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 각자 따로 생활했으며 루쉰은 계속 혼자서 방을 썼다.
루쉰은 결혼은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되며 사랑이 없는 결혼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애정없는 결혼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자신을 희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루쉰은 일찍이 <우리는 지금 어떤 아버지인가>라는 글에서 “자기는 인습의 책임을 짊어지고서 어두운 수문을 받치고는 그들에게는 넓고 밝은 세상으로 가서 이후 행복한 세월을 보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도록 풀어주었다”라고 적었다.
1925년 여름, 쉬광핑이 루쉰의 집에서 처음으로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였다. 그렇지만 루쉰은 자신은 더 이상 결혼으로 인한 행복을 얻을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 했다.
<상아탑을 나와서>는 루쉰이 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엮은 교재 가운데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이 쓴 러브스토리이다. 스토리에 나이 많은 교사와 젊은 여학생이 서로 사랑을 했지만 나이 많은 교사는 서로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년에 이르러도 두 사람은 여전히 불행하게 지냈다. 그제야 그는 당시 그가 옳다고 여겼던 생각에 대해 신은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미 불행한 결혼으로 다시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던 루쉰에게 쉬광핑은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브라우닝의 시구를 인용하였고, 이 시구는 두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니모옌은 책에서 “루쉰과 쉬광핑은 이 스토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루쉰은 쉬광핑에게 ‘너무 깊이 빠졌군, 내가 교실에서 강의하는 이 내용을 자넨 너무 잘 이해했어.’라고 대답했지만, 결코 쉬광핑을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쉬광핑이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기를 원했다”고 적고 있다. 루쉰과 사랑하려면 쉬광핑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조강지처 주안과 맞서야 했으며 본처와 첩의 명분문제에 대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난 내 자신의 것’, 이것은 여자사범대학의 학생인 루인(廬隱)이 봉건혼인제도를 반대하며 외친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여자사범대학 학생들 사이에 유행되어 그들이 봉건혼인제도를 반대하는 대표적인 구호가 되었다. 쉬광핑이 사랑을 위해 대담하고 적극적이었던 것에 비해 루쉰은 심리적으로 매우 큰 부담을 가지고 견뎌내고 있었다.
중국의 봉건사상은 그 뿌리가 너무 깊었으며 교수와 학생은 서로 다른 신분이었기 때문에 사제간의 사랑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루쉰이 사제지간의 사랑을 인정한다면 부인이 한 명 더 생기는 것인데,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첩을 들이는 것과 같아서 도덕적인 생활이라고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신문화운동의 주역인 루쉰의 일거수일투족이 사회의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과, 이미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 루쉰에게 사랑을 좇을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결혼은 사랑이 바탕이 돼야 하며 사랑이 없는 결혼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애정 없는 결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를 했던 루쉰이었지만, 쉬광핑과의 교제는 루쉰의 삶에 변화를 가져와, 애정이 없는 결혼 생활 속에 자신을 희생하려고 맘먹었던 생각이 흔들리게 되었다. 후에 일정기간동안 쉬광핑의 영향을 받은 루쉰은 ‘나도 사랑할 수 있다’, ‘난 왜 꼭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천천히 쉬광핑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신은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대화를 한지 얼마 후, 쉬광핑은 또다시 루쉰의 방에 찾아가 마지막으로 답을 해주기를 원했다. 한동안 쉬광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루쉰은 이윽고 “난 사랑할 수 있어. 그리고 자네만을 사랑해”라고 답했다. 그리고 웃으며 ‘자네가 이겼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루쉰과 쉬광핑의 사랑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쉰과 쉬광핑은 사진도 같이 쉽게 찍을 수 없었다.
저우쭤런은 1961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쉬광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사람이 주안(루쉰의 본처)을 동정해서 쉬광핑에게 자주 무례한 말을 했으나 원래 옛 사고방식을 가진 가정에서 자랐으니 나무랄 일도 아니네.”
루쉰과 쉬광핑
1926년 8월, 그들의 사랑을 확인했던 베이징을 떠남
1927년 10월, 상하이에 거처를 마련, 두 사람의 사랑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동거를 선언
1929년 10월 1일, 아들이 태어남, 이름을 하이잉(海嬰)이라 지음
1933년 5월,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편지를 편집해 <양지서(兩地書)>를 출판, 그들 사랑의 징표로 삼음
1936년 10월 19일 새벽 5시 25분, 루쉰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남
1968년 3월 3일, 쉬광핑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