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록

민속신앙

쑨아이 2010. 1. 10. 22:53

제14강, 제15강 민속신앙(民俗信仰)

1. 가신신앙

2. 마을 단위의 신앙

3. 산신신앙, 미륵신앙,

4. 무속신앙, 도깨비 신앙

들어가는 글

 한 겨울 흰 눈이 곱게 쌓여있는 오솔길을 걷다가 자신의 발자국을 한 번쯤은 돌아보게 된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긴 모습이 펼쳐져있다. 이렇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오랜 세월 동안 점철되어 내려온 삶의 일면들이 나의 생활 속에 녹아있다. 이 모든 것이 민속학이며 그 중 일부인 민속신앙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다른 부족과의 일전을 앞둔 부족이 승전을 기원하면서 제를 올리는 선사시대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역사시대로 오면서 길흉화복을 점치는 또 다른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현대사회의 일면을 살펴보자. 시험 보는 날 자녀의 아침밥상에 미역국과 계란을 준비하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입시생에게 찹쌀떡과 엿 등을 주는 것은 고전에 가깝다. 요즈음에는 잘 찍으라고 포크, 잘 풀리라고 휴지, 잘 보이라고 거울 등을 선물한다. 수년전에는 한자동차회사에서 시판되는 자동차의 한 글씨가 S라는 이유만으로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부모님이 부적이라도 지니라고 하면 펄쩍 뛸 신세대에게도 그들 나름의 해결 방식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낸다.

 인간은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력을 갖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각종 종교 문화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과학의 최첨단을 걷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일부에서는 오래된 문화적 관습이자 문화적 대안인 주술, 부적 등이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류가 지구에서 삶을 여유하기 시작한 순간부터가 민속이다. 민속은 수많은 세월 속에서 우리의 역사 속에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복잡다단하다.

그 중에서도  민속신앙은 하나의 종교 신앙이라기보다는 토착신앙의 성격이 있다. 민속신앙은 불교나 기독교처럼 체계화된 교리나 문서화 되어 있지 않다. 다만, 자연적 상황에 의해 만들어져서 종교화 된 것이다. 체계화된 조직이 없어 민간인의 생활을 통해 전승된 것이며, 민간인이 전승자이다. 이 땅에서 살았고 살고 있는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민속신앙을 살펴보고자 한다.

1.가신신앙(家神信仰)

 각 가정의 처소마다 그 처소를 관장하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가정의 안방마님(주부)이 제사. 고사 등을 지내며 집안의 평안과 가족들의 평안을 기원하는데 이를 가신신앙이라고 한다. 가신은 전국적으로 별 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정해진 위치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1)터주

 집터를 다스리는 신령으로 성주와 함께 가장 많은 가정에서 모셔졌던 대표적인 가신(家神)이다. 터주의 신체는 조그만 단지에 곡식을 넣고 뒤꼍이나 장독대에 모신다. 터주에 넣는 곡식은 가을에 추수해서 제일 먼저 난 곡식이며, 보리추수 때가 되면 새로 추수한 보리를 넣는다. 항아리에서 나온 벼는 칠석날까지 두었다가 식구들끼리만 식사를 해먹는다. 보리도 식구끼리만 밥을 지어먹었다.

(2)성주

 집안에서 모시는 신령 중 가장 으뜸이 된다. 대들보 밑이나 상기둥의 윗부분처럼 중심부에 북어를 매달거나 한지를 접어서 실타래로 묶어 둔다. 대청 한 켠에 있는 성주단지, 성주독 속에 쌀이나 나락 같은 곡물을 넣는다. 성주는 집안 식구들 중에서 특히 가장인 대주를 위한 신령으로 터주와 함께 거의 대부분 가정에서 모셨다.

(3)조왕

 부엌의 아궁이와 부뚜막을 관장하는 신이다. 이 부엌 신을 위해 아침밥을 지으려고 제일먼저 부엌에 들어가는 주부는 작은 기름 종지에 불을 밝혀 청수를 한 사발 올리고 가족들의 무사안위를 빌었다. 조왕신앙은 한국여인의 가족에 대한 모성애를 보여주는 강한 힘으로 볼 수 있다.

(4)업 

 광이나 곳간처럼 은밀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집안의 재복(財福)을 가져다주는 가신이다. 대부분 동물을 업신으로 모신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집안의 가족 중 한사람이 출생하면서 살림이 불어나는 경우, 혹은 며느리를 맞이한 후부터 살림이 불어나는 경우는 인(人)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두꺼비가 지네와 싸워 이겨서 주인을 구한 뒤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재물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생명존중현상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5)측신

 뒷간(변소)을 담당하는 신으로서 변소 각시 또는 측귀라고도 한다. 각 가정

에서는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더 많이 생각한다.

유럽의 경우 17세기 이전까지도 뒷간이 없어 나무 밑에서 볼일을 보고 아침이면 분뇨를 마구 버려서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파라솔이 등장하고 밟지 않으려고 높은 구두가 등장한 계기가 되었다.  어린 시절 변소에 앉아서 무서움에 떨면서 언니 오빠를 부르던 추억이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측신을 이해할 수없는 요즘의 세대처럼 서구인들에게 측신은 어떻게 다가올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6)삼신할머니(삼신신앙)

 명칭에서도 나타나듯이 여신(女神)이며 기자(祈子)의 대상으로부터 아이의 출생과 건강, 수명을 관장하고 산모의 건강도 담당한다. 흔히 아이를 점지해 준다거나 이이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많이 다치지 않았을 경우에 삼신할머니 덕이라고 한다.

(7)문신신앙

 수문신은 대문을 지키는 신으로 복은 들어오게 하고 재화(災禍)는 못 들어오게 막는다. 오늘날에도 입춘 때에는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붙여놓는 가정이 있다.

2.마을단위 신앙

집이 개인의 생활을 영유하는 삶의 터전이라면, 마을은 집들이모여서 마을 사람들 모두의 생활을 이어주는 삶의 공동체영역이다. 따라서 집과 마을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인간의 삶의 터전인 두 공간은 많은 공통점을 내포하고 있다.

 마을이란 사람들이 상호부조의 공동생활을 목적으로 집단적으로 모여서 거주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써 한국의 전통마을이란 오랫동안 시대변화에 동요됨이 없이 마을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지역집단을 말한다. 마을은 적게는 적은가구로 구성되기도 하고 수십 채가 한마을이 되기도 하며 큰 고을이 되면 수백 채가 도성(都城)에서는 수천채의 집들이 어울려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한정된 공간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자랑과 긍지를 제공하고, 외부인들의 침입에 대한 보호기능을 갖는, 심적 안정을 기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마을이 형성된 이래로 심리적으로 안정된 공간 확보를 위하여 여러 가지 민간신앙이 나타난다. 여러 가지 마을단위 신앙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마을 입구의 서낭당, 돌무지, 벅수, 솟대, 당나무 등과 같은 것은 마을 전체를 외부세계와 연결시키는 상징적, 종교적 위계를 지니게 된다.

(1)장승

 마을 입구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장승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서움과 푸근함이 함께 느껴진다. 요즈음도 시골마을 혹은 아파트 입구에 장승이  서 있는 곳을 간혹 볼 수 있다.

  장승은 마을 수호신이기는 하지만 산신 · 서낭 · 당산 등 마을의 주신에 부수된 하위신일 경우 동제의 일부로서 행하여지기도 한다. 마을의 주신인 산신과 서낭신은 당집이나 산정(山頂)에서 제관만이 참여하여 엄숙한 유교식으로 지내지만, 장승제는 전 주민 참여하에 축제적인 분위기로 지내곤 한다. 일반적으로 동제의 목적과 기능이 동네의 평안을 빌고 결속을 다지는 데 있다면, 장승제는 주민들이 힘을 합하여 마을의 액을 밖으로 내몰아 마을을 정화시키는 데 주력함으로써 이런 목적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민중문화의 한 상징으로 장승문화는 속담이나 수수께끼 · 설화 · 지명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장승에 관한 속담으로는 키가 멋없이 큰 사람을 ‘구척 장승같다’라든가 멍청하게 서있는 사람을 ‘벅수같이 멍하니 서 있다.’든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때 ‘장승 얼굴에다 분가루 발라놓고 분 값 내라고  한다.’ ‘입이 크되 말 못하는 것’ 등이 있다. 또, 장승에 관한 설화로는 장승을 치죄하여 도둑을 잡은 <명관치장승설화(名官治長丞說話)>가 있고 판소리로는 <변강쇠가>가 유명하다. 이외 장승 관련 지명으로 전국에 771개소가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승에 대한 기록으로는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의 비명(碑銘)에 통일신라시대인 759년 장생표주(長生標柱)가 가장 최초의 것이며, 그 뒤의 기록으로는 1085년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의 국장생과 황장생, 1689년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석장승, 1725년의 전라북도 남원군 실상사의 석장승 등이 보인다. 또한 용재총화, 해동가요 등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장승에 관한기록이 있다.

①개념: 장승이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 입구 길가에 세운 목상이나 석상을 말한다.

②장승의 소재와 형태: 나무기둥, 돌기둥으로 윗부분은 사람의 얼굴 형태를  소박하게 조각하고 아래 부분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의 글씨를 가장

많이 새겨 놓았다. 목장승은 주로 소나무와 밤나무가 사용되지만, 비바람에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부식되므로 매년 또는 2,3년마다 새로 만들어 세우곤 한다. 장승은 하나만 서 있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남녀 한 쌍을 세우며, 다섯 방위 또는 경계표시마다 1기씩을 세우기도 한다.

③명칭: 장승(장성, 장신)과 벅수(벅시, 법수)가 가장 일반적이고 돌하루방, 수살이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④기능: 마을장승은 마을입구, 동제신역(洞祭神域)에 세워진다. 동제의 신으로서 마을 수호와 벽사, 축귀, 방재의 기능과 수문신의 기능을 한다.

사찰입구나 절의 경계에 세워져서 사찰수호, 절의 경계표시, 잡귀의 침입을 막는 사찰 수호기능을 지닌다.

 공공기능으로서 지역경계, 성문, 병영, 창고, 관로(官路) 등에 세워졌다. 이정표 겸 거리신으로서 성문, 병영, 길과 해운의 안전을 기원한다. 기타 산천비보(裨補)의 기능 혹은 각종기원의 기능을 한다.

 이와 같이 장승은 위치에 따라 여러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지만 흔히 수호신으로 또는 개인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대상으로서 신앙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2)솟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대상물. 지역이나 목적에 따라 소줏대·표줏대·솔대·거릿대·수살목·서낭대 등으로 불린다. 솟대의 기원은 삼한시대로 보고 있으며, 북아시아 문화전통에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농가에서 섣달 무렵에 새해의 풍년을 바라는 뜻에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장대에 높이 달아맨다. 이 볏가릿대를 넓은 마당에 세워 두고 정월 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벌이는데, 이렇게 하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또 민간신앙의 상징물인 장승 옆에 장대를 세우고 장대 끝에 새를 나무로 깎아서 달기도 하였다. 이 밖에 경축의 의미로는 옛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위해 마을 입구에 주홍색을 칠한 장대를 세우고, 끝에 청색을 칠한 용을 만들어 붙이는데 이것도 솟대라고 한다.

 솟대는 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지는데, 이는 마을 밖의 부정·무질서의 세계와 마을 안을 경계 짓는 공간에서 보다 강한 신성으로서 마을 밖의 부정을 막고 마을의 신성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마을의 지세가 떠나가는 배 모습을 닮은 행주형(行舟形) 지세에는 솟대를 마을의 중앙에 세웠다. 돛대가 있어야 배가 가라앉지 않는다고 해서 마을 중앙에 솟대를 세웠다. 마을 사람들은 이

것을 마을을 지키는 제단이라고 해서 진동단(鎭洞壇)이라 불렀고 그 위에 앉

은 오리가 홍수로부터 마을을 구해준다고 믿었다. 배에 구멍이 나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해서 우물도 파지 않고 마을 가에만 우물을 파서 생활하였다.

솟대는 오늘날까지 각 마을에 세워져 있는데 보름날에 솟대를 세우면 한해의 풍년이 온다고 한다.

①오리의 상징성

  새의 방향은 일정하지는 않으나 경우에 따라서 남과 북(풍년기원), 마을 안쪽과 밖(액운을 가지고 날아가라는 뜻), 풍수지리상 허한 쪽 향하게 한다. 그러나 급제 기념하여 만드는 솟대는 반드시 북쪽을 향하게 한다. 

1. 물고기를 물고 있는 오리의 모습이나, 오리알이 그 자체로 생산과 풍요의 주술적 존재로 인식했다.

2. 오리는 물새로서 하늘, 땅, 물을 그 활동 영역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만을 활동 영역으로 삼는 다른 새들이나 산새보다 종교적인 상징성을 지닙니다.

3. 오리는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경 마을에서 비를 가져다주는 농경 보조신으로 발달하였다.

4. 오리는 물새이며 잠수조이기 때문에 홍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불사의 새로 생각되었습니다.

5. 불을 극복하여 화재를 방지하는 존재로 인식

6. 철새로서 계절의 변화, 저승과 이승을 연결시켜 주는 존재로 인식.

- 오리는 계절이 바뀌는 변화를 암시해 주고 초자연적인 세계로의 여행을 의미하며,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넘나드는 영혼의 순환적 여행을 뜻합니다.

②장대의 의미

 세계 어느 지역이나 장대 기둥은 종교의 주술적의미로 하늘의 뜻이 장대를 통해서 내려오고 사람들의 뜻이 장대를 통해서 하늘로 올라간다. 즉 장대를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의 통행로로 생각하였다. 솟대로 사용될 나무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고 소와 말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깊은 산속에서 구했다.

(3)서낭당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 ‘성황당’이라고도 한다.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그 곁에는 보통 신목

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서낭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한국 전래의 천신(天神)과 산신(山神)이 복합된 것으로 여기에 중국에서 유입된 성황신앙(城隍信仰)이 융합되었다고 한다. 성황신앙은 성읍의 둘레에 못을 파놓고 그 못에 깃든 신(神)이 성읍을 지켜준다고 믿는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송대(宋代)이후 보편화되었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성황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다. 고려 문종 때

선덕진의 새로운 성에 성황사를 짓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서낭당이 고려시대만 해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올리던 사당이었음을 알 수게 하는 대목이다. 고려 고종은 몽고군의 침략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의 칭호를 내린 일도 있었다. 조선 시대 중기에 사림파의 등장은 서낭당을 부정한 귀신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생각했다.

 서낭당은 마을수호, 마을의 안녕, 농사의 풍요, 건강기원, 소원성취 등을 기원하는 민간종교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으로서 신앙의 장소이다.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나무·오색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다녔다. 물론,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지켜짐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서낭당과 관계된 것으로, 서낭나무에 입던 옷의 저고리 동정이나 5색 헝겊 조각을 걸고 치병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거나, 새 집으로 이사할 때 옛 집의 잡귀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옷을 찢어 걸어놓기도 하는 속신이 있다. 이밖에도 서낭당을 지날 때에 돌을 올려놓고 침을 3번 뱉은 다음 왼쪽 발꿈치로 땅을 3번 구름으로써 행로의 안전과 행운을 기원하는 등 민간에서 전해지는 여러 가지 형태의 풍속이 있다. 그밖에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서 마을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서낭당에 올리는 제의(祭儀)에는 마을수호와 질병의 예방을 위하여 마을굿의 형식으로 해마다 지내는 서낭제와 잡다한 개인적 소망을 기원하는 개별적인 제의가 있다. 서낭제는 온 동네의 축제였다. 양반을 위해 유교적 제사를 지내고 다음으로 성황굿이라는 무속적인 행사를 진행했다. 그러다가 양반사대부들이 차차 미신으로 경계하여 참여하지 않으면서 무속행사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서낭신은 무속에 수용되어 무신(巫神)의 하나가 되었으며 서낭굿이 굿의 한 마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5)서낭목(당나무)

 당나무는 서낭당과 마찬가지로 마을사람들을 보호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공간이다. 당나무의 일반적인 위치는 서낭당이 마을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과는 달리 진입하는 길과 안길이 만나는 지역, 즉 주거지가 시작되는 부근에 배치된다. 이러한 위치는 방문객의 감시가 용이한 곳이 되며, 남녀노소를 막론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휴식공간이며 놀이공간이 된다. 그리고 나무 밑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높이로 단이 설치되며, 그 윗면을 평평하게 만들어 앉아서 불편한 고충을 없앤다. 특히 여름철 나무아래 그늘은 햇빛, 비, 눈이 오면 우산을 펴 놓았을 때 형성되는 아늑한 공간과도 같은 곳이 되며,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관심사가 논의되고 결정되

어진다. 즉 마을을 풍요하게 하는 기운이 생성되는 장소이었다.

 당나무의 성격은 마을과 관계되는 유래와 전설을 함께 가진다. 이것은 자연숭배사상과 조상숭배사상이 결합되어서 마을 사람들 잠재의식 속에 보호되고 있는 정신적인 중심이 되었다. 당나무 옆에는 넓은 마당이 형성되어 동제(洞祭)등 마을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된다. 동제란 생활의 지역과 조건을 같이하는 마을 사람들이 생활의 위협이 되는 재해(災害)를 면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신에게 빌며 편안한 생활을 목적으로 마음을 합쳐서 지내는 향토적 연례행사 중에 하나이다. 마을이라는 사회적 의미와 의례라고 하는 종교적 의미가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고서 공동으로 會食(회식)하며 같은 신에 대해 같이 복종하거나 같은 신화를 듣고 신에게 의지하면서 동질화(同質化) 되며, 공동사회의 결합을 강화한다. 이러한 부락제는 마을굿과 별신굿이 있다. 마을굿은 정기적인 부락의 행사이고, 별신굿은 다른 부락과 함께 하는 큰 행사이다. 이러한 굿이 행해질 때의 기능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신성기간(神聖期間)의 설정과 마을을 지역공동체의 단위로 묶는 화목과 단합이다. 다른 기능은 축제의 기능이다. 제의(祭儀)와 음복(飮福)이 끝나면 농악대(農樂隊)와 그에 동반되는 가면놀이, 농악, 줄다리기 등 축제분위기를 북돋을 수 있는 행사가 펼쳐졌다. 이밖에 당나무의 다른 기능은 마을로 진입할 때에 시각적 표시물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마을의 진입로 혹은 마을 한가운데 보호수라고해서 볼 수도 있다.

3.산신신앙. 미륵신앙

(1)산신신앙

산이 국토의 70%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산에 대한 믿음과 경배가 강했다. 산은 주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목재의 공급처이며 약초의 생성지이고 사냥터이기도 했다. 웅장하고 험준한 산악은 경제적인 이익추구와 더불어 생활의 방어에 있어 공포적인 심리를 주기 위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찍이 단군신화 속의 환웅이 이 땅에 내려온 곳도 태백산 신단수 아래였다.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선·악·병·형(刑) 등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다스리다가 웅녀와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후에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산신숭배는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자연 숭배사상이었다. 산신은 조선시대 후기에 불교에 흡습되면서 사찰에 산신각이 들어서게 된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이다. 산신은 사찰의 명당자리에 함께하면서 산과 사찰을 보호하는 신이 된다. 오늘날에도 사찰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토착신앙이다.

 산신도에는 산신과 호랑이가 등장한다. 산신은 백발에 흰 수염이 길게 난 모습으로 나이를 헤아릴 수 없다. 표정은 위엄을 지녔으면서도 자애롭게 느껴진다. 호랑이는 산에서 사는 맹수 중 가장 용맹하고 두려움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산신의 옆에서 순한 개나 고양이처럼 있다. 호랑이는 신성한 동물이지만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탐욕스럽기 때문에 신의 사자가 되려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 불교에서는 산신령에게 귀의하려는 호라이에게 감로수를 먹이는 장면을 그리기도 한다. 산신도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산신님’ 주변에 항상 소나무가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산신도와 화면 분위기가 유사한 독성도(獨聖圖)에 소나무가 등장하지 않고 있는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독성은 불도(佛道)를 스스로 깨우쳐 높은 경지에 도달한 도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찰의 독성각에 단독으로 모셔지거나 삼성각(三聖閣)에 산신도와 함께 봉안되기도 한다.

 독성도를 보면 산신도의 ‘산신님’처럼 생긴 독성이 깊고 그윽한 산골짜기를 배경으로 혼자 앉아 있다. 화면의 분위기는 산신도와 매우 비슷하지만, 산신도에서처럼 특별히 소나무가 등장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산신도의 소나무가 단순히 자연 풍경을 구성하는 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 상징물로 그려진 것임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웅이 지상으로 하강할 때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고 하였다. 신화에 나타난 태백산과 신단수의 결합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당산과 당산 나무의 결합에 그 자취를 드리우고 있다. 무속에서는 당산 나무가 신의 세계인 하늘과 인간들의 세계인 땅 사이에 자리잡아 그 두 세계 사이의 고리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이 경우 그것을 우주목(宇宙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산신도에 나타나는 소나무도 우주목의 하나로 느껴진다.

(2)미륵신앙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로 내려와서 제일 먼저 미륵불의 용화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미륵불은 머지않은 장래에 이 땅에 출현하여 백성들을 구제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만들어진 부처님이다. 

미륵신앙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올라간다. 삼국유사에 보면 백제 무왕 때에 미륵불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미륵사를 세우고 미륵불을 만든 것이다. 신라시대의 화랑과 미륵신앙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은 분명 미륵신앙이 신라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특징이었다. 신라에서 미륵신앙이 넓게 퍼져 있었음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기사와 불상 등을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신라 최초의 절이었던 흥륜사의 주불은 미륵불이었다. 진평왕 때 흥륜사의 승려 진자스님은 항상 미륵불상 앞에서 대승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출현하여 줄 것을 발원하였다. 또한, 진평왕 때 화랑으로 활동하였던 김유신은 그의 낭도들을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용화란 미륵보살이 장차 성불할 용화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륵하생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처럼 화랑과 미륵신앙과의 관련은 귀족층의 목적 의도와 민중의 구원론적인 이상이 합일된 데서 나타날 수 있었다. 화랑이 꽃같이 용모 단정한 미소년들이었다는 것은 미륵보살의 용모에 견준 것이다.

 신라 말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태봉국을 세운 궁예에서 볼 수 있듯이 미륵신앙은 정치적으로도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호란과 왜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의 가슴에 깊숙이 새겨진 신앙이었다. 전쟁이라는 참화 속에서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힘없는 일반 백성들은 종전 후 전염병으로 생명을 빼앗기게 된다. 의학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서민들은 주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마을 주변에 미륵불을 세운다.

조선후기에는 성리학이 강화되고 전란 후 종족보존의 의지가 아들을 선호하게 된다. 아들을 얻기 위해 미륵불을 세우고 일부는 속설에 따라 미륵불의 코를 갈아먹기도 한다. 또한 미륵은 풍농 풍어 등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도처에서 미륵불을 볼 수 있는 것은 전국적으로 매우 활발했던 민간신앙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4.무속신앙. 도깨비신앙

(1)무속신앙

 무속이란 무당을 주축으로 민간에서 전승되는 종교 습속을 말한다. 무(巫) 자는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 양옆에 두 사람이 춤추는 모습이다. 여기서 기둥은 신목이고 춤추는 이가 무동이다. 무당은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알리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 인간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있어온 민간 신앙의 한 형태이다.

 전통적으로 이어내려 오는 무(巫)의 형태는 몇 가지로 볼 수 있다.

 

①세습무

 ②강신무형

 ③무구에 의해서 입무

 ④무가와의 혼인에 의해서 입무

 ⑤생활고을 해결하기위해서 입무

무속(巫俗)은 한국의 전래신앙으로 크게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① 마을신앙 :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빌기 위해 1년에 정기적으로     1-2번씩 갖는 풍어굿, 풍농 굿 등의 제의로 이루어진다.

 ② 집안신앙: 집 안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신격들인 성주, 산신, 터주, 조왕,    대감, 업, 문신, 곳간신 등 을 모시는 의례로 정초의 안택(安宅)이나 시월    상달고사로 모셔진다.

 ③ 점복 : 인간의 운명을 예언하는 행위로 전문적인 점술사도 있다. 이밖에    도 동식물숭배, 사귀신앙(도깨비, 잡신, 처녀귀신, 총각귀신 같은 사귀를     모시는 의례), 자연신앙(돌, 나무 등 자연 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등    을 포함한다.

 

(2)도깨비 신앙

 허주(虛主) ·독각귀(獨脚鬼) ·망량 ·이매(魅)라고도 한다. 음허기(陰虛氣)로서 원시신앙적인 귀신사상에 의하여 형성된 잡신이지만, 음귀(陰鬼)로서의 귀신과는 다르다. 도깨비는 사람이 죽은 후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일상생활의 용구로 쓰다가 버린 물체에서 생성된다고 한다.

 도깨비는 삼국시대를 전후하여 탄생한 것으로 보여 진다. 삼국이 남겨놓은 문화유산에 도깨비 문양들이 많이 발견된다. 특히 기와와 벽돌에서 원형의 도깨비 형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조선에서도 도깨비는 창덕궁 금천교 조각이 있고 그 외에도 전등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사찰의 여러 전각에도 도깨비가 있다. 도깨비는 초인적인 괴력(怪力)을 지니고 있으므로 황소를 지붕 위에 올려놓고, 솥뚜껑을 솥 속에 넣으며 큰 산을 움직이고, 큰 바위를 굴리며 많은 물을 단숨에 마신다는 것이다. 한편 이 괴력으로 심술궂은 일도 많이 하는데, 논에 개똥을 가져다 놓으며, 밤사이에 가구를 엎어 놓고, 국수를 산에다 버리기도 하며, 물고기나 궤를 훔쳐간다.

도깨비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 주로 도깨비는 마을 근처의 빈 집이나 음침한 굴속에 산다. 그는 인간과 같은 희노애락을 느끼는 존재이며, 인간의 흉내를 잘 낸다. 화가 나면 무엇이든 집어던지거나 고함도 잘 지른다. 도깨비 무리도 인간사회와 같은 상하 위계질서가 있다.

 민속에서의 도깨비는 서해 위도의 띠뱃놀이에도 풍어를 기원하는 짚도깨비가 등장하고, 안동 하회탈에도 턱주가리가 없는 이매탈이 있다. 제주도에도 풍어와 관련된 물도깨비 신앙이 있고, 정월 민속의 제웅도 도깨비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도깨비 굿의 전승은 육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진도의 경우도 해안가라기보다는 내륙에 근접한 곳에서 전승되었다. 따라서 해안을 따라서 전승된 풍어신격으로의 도깨비와 육지 쪽에서 형성된 역신으로의 도깨비로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특이하게도 풍어신격과 역신으로의 도깨비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도깨비는 재물과 관련이 있다. 도깨비방망이를 두드리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나온다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서민들의 심정이 간절하게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도깨비 이야기는 부자가 된 것에 그치지 않고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 혹 떼러 갔다가 혹을 붙이고 돌아온 욕심쟁이 영감이야기 착하고 효자인 동생은 복을 받는다는 것은 대표적인 내용이다.

도깨비가 재물을 가져다주더라도 진실 되게 얻어진 것이라야 하고 허황된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것이다. 삶 속에서 교훈을 주는 도깨비 신앙은 물질의 풍요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돌아볼 시간을 필요로 하게 한다.    

 대략적이고 간단하게 몇 가지 민간신앙을 살펴보았다. 이 밖에도 이 땅에는 많은 민속신앙이 있다. 신앙은 인간의 마음을 나타내는 간절한 믿음의 표현수단이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민속신앙이 있다. 우리의 삶과 맞대고 있는 환경에 맞게 만들어지고 계승되어온 민속신앙은 서구인들의 잣대로 낮게 평가되고 미신으로만 치부되는 것은 경계해야한다. 오늘날에는 세계 여러 나라들이 관광자원으로 부가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나라에 있는 많은 민속자원은 관광산업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감으로서 새로운 관광 상품의 창출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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